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4.19 혁명/진행 (문단 편집) ==== 서울 ==== ||[youtube(iqg_ycBYVFs)]|| ||4.19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4월 19일, 신문에 실린 어젯밤의 소식은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깡패들이 평화 시위를 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해 폭력을 자행했다는 것은 크나큰 분노를 가져왔다.[* 오보였지만 학생 1명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도 신문에 실려 있었다고 한다.] 대학생들은 21일 예정했던 시위를 앞당겨 19일을 거사일로 바꾸고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19일 오전 11시에 시위를 시작할 것이라는 역정보를 동대문경찰서에 흘린 뒤 실제로는 19일 오전 9시 경에 출발하였다. 우선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원래 문리대 학생회 등 대학생들이 계획했던 의거일은 4월 21일이었고 서울의 고등학교 학생들의 의거일이 4월 19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먼저 안 고대생들이 고등학생들에게 뒤쳐질 수 없다며 4월 18일 먼저 시위했고 고려대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으며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서울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일 먼저 가두시위를 시작하였고 서울대 문리대생이 그 시위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이와 같은 구호들은 여러 번 나왔다. [[5.18 민주화운동]] 때에도 "[[김일성]]은 오판 말라, 반공 정신 이상 없다" 같은 구호가 있었다.]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대학 곳곳에 격문이 나붙고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한 대학생들은 비장한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고등학생들은 원래 19일이 거사일인지라 아침부터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일찍 수업이 끝난터라[*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집단 데모를 할 것을 우려해 오후 1시에 하교하도록 했으나 이는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부추기는 꼴이었다.] 하굣길에 시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제 고등학교와 대학교마다 수백,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모교에서부터 쏟아져나왔다. 학생 시위대는 점차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의 방향은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를 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시위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가 넘자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어 여러 방면에서 경무대로 접근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부민관)[*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건물.]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 광화문은 이때 복원되지 않고 있던 상태여서 세종로 앞은 뻥 뚫린 공터였다.]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해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folding ※ 4월 19일 서울지역 시위 사망자 명단 : 보기 / 접기 ||<-5> ''4월 19일 서울지역 시위 사망자[* 경찰 사망자는 하늘색으로 구분하였다.] 및 상이후사망자 명단'' || || 강석원 || 강창조 || 고병래 || 고순자 || 고완기 || || 곽영현 || 구순자 || 김관식 || 김부연 || 김영기 || || 김왈영 || 김용안 || 김응수 || 김재준 || 김찬우 || || 김창무 || 김창섭 || 김창필 || 김철호 || 김지호 || || 김태년 || 김현기 || 남기성 || 남정만 || 노희두 || || 문화웅 || 민병록 || 박건정 || 박도일 || 박동훈 || || 박상범 || 박찬원 || 박호진 || 백남웅 || 서현무 || || 손경호 || 손중근 || 송영근 || 신경식 || 신보웅 || || 심은준 || 심자룡 || 안경식 || 안병채 || 안승준 || || 안응헌 || 안종길 || 염춘식 || 유재식 || 윤경웅 || || 윤광현 || 윤지섭 || 이규복 || 이근형 || 이기석 || || 이상관 || 이상헌 || 이성엽 || 이시광 || 이익관 || || 이정옥 || 이종양 || 이창원 || 이채섭 || 이청수 || || 이향길 || 이흥수 || 임동성 || 임성희 || 임용학 || || 임원협 || 장동원 || 장동환 || 장인서 || 전무영 || || 전한승 || 조광집 || 조선관 || 조조남 || 조주광 || || 지영헌 || 진삼두 || 진영숙 || 차명진 || 차성원 || || 천인복수 || 최기두 || 최기태 || 최동섭 || 최신자 || || 최정규 || 최태식 || 한명남 || 한정기 || 홍순선 || || 홍종필 || 황규직 || 김병진 || 한진수 || 김광석 || || 김영곤 || 장기성 || 최현석 || 장인모 || 정석조 || || 최학서 || 최현철 || 구자숙 || 김길현 || 이기태 || || 차대공 || 채광석 || 곽종한 || 원일순 || 유종환 || || 이효희 || 안부자 || 정임석 || 전재근 || 김성수 || || 정규철 || 이영 || 고해길 || 김정기 || 이항구 || || 하정수 || 한인관 || || || || }}}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의 만해광장 옆 언덕배기에 있는 동우탑은 노희두 열사를 기리기 위한 추념물이다.] 이 당시의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하단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경무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 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또 경무대 앞 발포를 시작으로 경찰의 발포는 하루종일 이어져 시위에 참여하던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 경찰측 사망자도 3명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총으로 시민의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몰려가 경찰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가하면 시위대에게 물이나 음식을 제공하거나 부족한 피를 위해 헌혈에 나서는 등 조력도 아끼지 않았다. 시위대는 먼저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하여 경찰과 아슬아슬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